자사주는 왜 ‘두 번째 현금’이었나: 소각 의무화가 끝낸 대기업의 숨은 지갑
자사주를 사 놓고 곧바로 없애지 않는 기업에는 이유가 있었다. 주가를 떠받치는 수단이면서 임직원 보상, M&A, 자금조달에 다시 쓸 수 있는 ‘전략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6년 한국의 규칙이 바뀌었다. 이제 질문은 “왜 안 태우나”보다 “소각이 의무가 된 뒤 기업은 무엇으로 투자 여력을 확보할 것인가”에 가깝다.

20초 핵심
자사주는 ‘태워야 끝나는 주식’이 아니었다
투자자 입장에서 자사주 매입은 간단해 보인다. 회사가 시장에서 자기 주식을 사고, 그 주식을 소각하면 전체 주식 수가 줄어든다. 기업가치가 같다면 한 주가 차지하는 몫은 커진다. 그래서 자사주 소각은 가장 직접적인 주주환원 수단 중 하나다.
하지만 기업의 계산은 조금 달랐다. 소각하지 않은 자기주식은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임직원에게 성과보상으로 지급할 수도 있고, 기업 인수 과정에서 현금 대신 주식으로 넘길 수도 있었다. 과거에는 자기주식을 교환 대상으로 하는 교환사채를 발행해 현금을 조달하는 길도 열려 있었다.
이 때문에 자기주식은 회계상 ‘현금’은 아니지만 경영진에게는 현금과 주식 사이에 놓인 선택권에 가까웠다. 당장 없애지 않으면 나중에 쓸 수 있었다. 주주가 원하는 것은 소각이지만, 기업이 원한 것은 선택권이었다.
그 선택권을 2026년 법이 크게 줄였다
한국에서는 이제 과거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2026년 3월 시행된 개정 상법은 회사가 취득한 자기주식을 원칙적으로 1년 안에 소각하도록 하고, 자기주식을 대상으로 한 교환사채 발행도 막았다. 금융위원회도 6월 관련 공시 규정을 정비했다.
이 변화의 의미는 분명하다. 자사주를 “언젠가 필요할 때 쓰는 비상금”처럼 장기간 보유하는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시장은 자사주 매입을 보다 명확한 주주환원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됐지만, 기업은 자금조달과 보상 수단 하나를 잃었다.
삼성전자 사례도 이 변화가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삼성전자는 2026년 3월 약 5조3,455억원 규모의 기존 자기주식 소각을 결정했다. 동시에 2026년 들어 임직원 주식보상을 위해 자기주식을 계속 매입하고 지급하고 있다. 8월에는 성과보상 목적의 15조원 규모 자사주 매입도 결정했다. 자사주가 ‘소각’과 ‘보상’이라는 서로 다른 목적을 동시에 갖는다는 뜻이다.
반도체 회사가 현금을 놓지 못하는 이유
자사주 논쟁이 반도체 기업에서 더 예민한 이유는 돈이 들어가는 단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최첨단 노광장비인 High-NA EUV는 한 대 가격이 최대 4억달러 수준이다. 장비 한두 대가 아니라 수십 대의 장비, 클린룸, 전력, 패키징, 연구개발까지 묶이면 공장 하나가 수십조원짜리 프로젝트가 된다.

SK하이닉스는 2026년 8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Y2 팹 건설에 35조2,246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삼성전자도 2025년 연간 CapEx가 52조7,000억원이었고, 이 가운데 47조5,000억원이 반도체 DS 부문에 들어갔다.
이 산업에서 현금은 놀고 있는 자산이 아니다. 업황이 꺾였을 때도 차세대 공정 전환을 멈추지 않게 해주는 완충재다. 메모리 가격이 떨어지는 시기에 경쟁사가 투자를 줄일 때 설비를 계속 깔 수 있다면, 다음 업사이클에서 점유율과 원가 경쟁력의 격차가 벌어진다.

미국식 주주환원은 왜 더 쉬워 보일까
애플은 2025 회계연도에 약 900억달러의 자사주를 매입했다. 그럼에도 같은 시점 현금·현금성자산·유가증권은 1,324억달러였다. 핵심은 “미국 기업은 주주를 더 생각한다”가 아니다. 막대한 잉여현금흐름을 만들면서도 성장투자를 외부 파운드리와 공급망에 상당 부분 분산할 수 있는 사업구조가 대규모 환원을 가능하게 한다.

반대로 반도체 제조사는 공장을 직접 짓고 장비를 직접 산다. 같은 1조원의 현금도 플랫폼 회사와 제조 회사에서 의미가 다르다. 자사주 소각 비율만 비교하면 이 차이를 놓치기 쉽다.
자사주 소각은 분명 주주에게 유리하다. 하지만 소각 규모만으로 경영의 질을 판단하면 위험하다. 성장 기회가 적고 현금이 남는 기업이 주식을 소각하는 것과, 기술 전환 직전에 필요한 투자까지 줄여가며 소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결정이다.
반도체 투자자가 봐야 할 질문은 “몇 조원을 태웠나”가 아니다. 소각과 배당 이후에도 차세대 노드, HBM, 패키징, 전력 인프라, M&A를 감당할 순현금과 자유현금흐름이 남는가다.
2026년 제도 변화로 한국 기업의 자사주 장기보유 선택권은 축소됐다. 다만 이것이 곧바로 모든 기업의 공격적 소각이 최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산업별 자본집약도와 현금창출력을 함께 봐야 한다.
- 아니다. 주식 수가 줄어 주당가치에는 긍정적이지만, 기업 실적과 밸류에이션이 동시에 악화되면 주가는 떨어질 수 있다. 소각은 기업가치를 만드는 원천이 아니라 기업가치를 나누는 방식에 가깝다.
- 2026년 이후 한국에서는 과거처럼 장기 보유 자체를 전략으로 삼기 어렵다. 원칙적 1년 내 소각 규칙 때문에 보유 목적과 처분 계획을 더 명확히 설명해야 한다.
- 무조건 그렇지는 않다. 핵심 인재를 붙잡아 장기 성과를 높인다면 비용 이상의 가치가 생길 수 있다. 다만 소각 기대를 주고 매입한 주식을 대규모 보상에 사용하면 주주환원 효과는 약해진다.
- 아니다. 투자 수익률이 자본비용보다 낮다면 과잉투자다. 최선은 무조건 투자도, 무조건 소각도 아니다. 높은 수익률이 예상되는 프로젝트에는 투자하고, 남는 자본은 주주에게 돌려주는 자본배분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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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 타임스 편집부





